옛날
잃어진 그 옛날이 하도 그리워
무심(無心)히 저녁 하늘 쳐다봅니다
실낱같은 초순(初旬)달 혼자 돌다가
고요히 꿈결처럼 스러집니다
실낱같은 초순(初旬)달 하늘 돌다가
고요히 꿈결처럼 스러지길래
잃어진 그 옛날이 못내그리워
다시금 이내맘은 한숨 쉽니다
물레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어제도 오늘도 흥겨이 돌아도
사람의 한 생(生)은 시름에 돈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외마디 겹마디 실마리 풀려도
꿈 같은 세상(世上) 가두새 얽히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언제나 실마리 감자던 도련님
언제는 못 풀어 날 잡고 운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원수의 도련님 실마리 풀어라
못 풀 걸 왜 감고 날다려 풀라나.
가 을
어제는
아름답게도 첫 봄의 꽃 봉오리가
너의 열락(悅樂) 가득한 장미의 뺨위에
웃음의 향기(香氣)를 피우며 떠돌았으나,
오늘은
쓸쓸하게도 지는 가을의 낙엽(落葉)이
너의 떨며 아득이는 가슴의 위에
어린 꿈을 깨치며, 비인 듯 흩어지어라.
갈매기
신미도(身彌島)라 삼각산(三角山)
갈매기 우네,
갈매기 새끼 잃고
어엽서 우네.
별애우 수풀밭에
달빛 밝으면
아바지, 어머니여
새끼가 찾고.
가을바람 휘돌아
갈 길은 먼 곳,
새끼를 못 잊어서
어미가 우네.
강(江)가에서
실버드나무 가지에 새눈이 돋아나오며,
해죽해죽 웃으며 흐르는 강(江)물에 씻기우는
강(江) 두던에는 새 봄의 기운(氣運)이 안개같이 어리울 때,
“나를 생각하라”고, 그대는 속삭이고 갔어라.
넘어가는 새빨간 핏빛의 저녁 노을이,
늦어가는 소녀(少女)의 나물 광주리에서 웃으며,
꿈을 잃은 늙은이의 가슴을 덮어 비추일 때,
“나를 생각하라”고, 그대는 속삭이고 갔어라.
악조(樂調)의 고운 꿈길이 두 번 보드라운 바람을 따라,
저멀리 먼 바다를 건너 새 방향(芳香)을 놓는 이 때,
“나를 생각하라”신 그대는 찾기조차 바이 없어라.
밤이면 밤마다, 날이면 날마다 노래 부르며,
물결의 기억(記憶)이 흰 모래밭을 숨어드는 이 때,
“나를 생각하라”신 그대는 찾기조차 바이 없어라.
-『개벽』1922. 6월호
고적(孤寂)
바다에는 얼음이 덮히고
대지(大地)는 눈속에 잠들어,
가이없는 나의 이 ‘고적(孤寂)’은
의지(依支)할 곳도 없어지고 말아라.
보라, 서(西)녘 하늘에는
눈썹같은 새빨간 반(半)달이
스러져들며, 새까만 밤이
헤매며 내리지 않는가.
곽산(郭山) 고을
내려쌔는 흰 눈에
밤은 고요코,
정거장(停車場) 곁 옛고을
낡은 거리엔
등(燈)불은 눈을 감고
잠들었나니,
나도 그만 누워서
잠이나 자랴.
가이없는 그날의
나의 사랑은
잠잠한 옛거리에,
소리없이 내려선
녹아버릴 눈
그것이나 다르랴.
꿈의 노래
밝은 햇볕은 말라가는 금(金)잔디 위의
바람에 불리우는 가마귀의 나래에 빛나며,
비인 산(山)에서 부르는 머슴군(君)의 머슴노래는
멎음없이 내리는 낙엽(落葉)의 바람소리에 섞이여,
추수(秋收)를 기다리는 넓은 들에도 빗겨 울어라.
지금(只今)은 가을, 가을에도 때는 정오(正午),
아아 그대여, 듣기조차 고운 낮은 목소리로,
조심(操心)스럽게 그대의 ‘꿈의 노래’를 부르라.
나의 이상(理想)
그대는 먼 곳에서 반듯거리는
내 길을 밝혀주는 외로운 벗,
한 줄기의 적은 빛을 그저 따르며
미욱스럽게도 나는 걸어가노라.
그대가 있기에 쉬임도 없고
그대가 있기에 바램도 있나니,
아아 나는 그대에게 매달리어
티끌 가득한 내 세상(世上)에서 허덕이노라.
나는 아노라, 그대의 곳에는
목숨의 흐름이 무늬 고운 물결을 짓는
아름다운 봄날의 꽃밭 속에서
화평(和平)의 꿈이 웃음으로 맺어짐을.
나의 발은 피곤(疲困)에 거듭된 피곤(疲困),
나의 가슴에는 가득한 새까만 어두움!
아아 그대 곳 없다면, 나의 몸이야
어떻게 걸으며 어떻게 살으랴.
아아 애닯아라, 그대의 곳은
한(恨) 끝도 없는 머나먼 지평선(地平線) 끝!
그러나, 나는 그저 걸으려노라,
눈먼 새 외동무를 따라가듯이.
낙타(駱駝)
새빨간 새빨간 저녁 별을
함뿍히 무거운 짐에다 받으며
사막(沙漠)을 허덕허덕 걷는 나의 낙타(駱駝)여
가도가도 사막(沙漠)은 끝없는 것을
나의 낙타(駱駝)
인생(人生)의 이 사막(沙漠)을 나는 우노라
새빨간 새빨간 저녁 별을 받으며.
내 설움
능라도(綾羅島) 기슭의
실버드나무의 꽃이
한가로운 바람에 불리어,
수면(水面)에 잔 무늬를 놓을 때,
내 설움은 생겨났어라.
버들꽃의 향(香)내는 아직도 오히려,
낙엽(落葉)인 나의 설움에 섞이어,
저멀리 새파란 새파란 오월(五月)의
하늘끝을 방향(方向)도 없이 헤매고 있어라.
내 세상(世上)은 물이런가, 구름이런가
혼자서 능라도(綾羅島)의 물가 두던에 누웠노라면
흰 물결은 소리도 없이 구비구비 흘러내리며,
저 멀리 맑은 하늘, 끝없는 저 곳에는,
흰구름이 고요도 하게 무리무리 떠돌아라.
물결과 같이 자취도 없이 스러지는 맘,
구름과 같이 한가도 하게 떠도는 생각.
내 세상(世上)은 물이런가, 구름이런가.
어제도 오늘도 흘러서 끝남 없어라.
-『개벽』1922. 6월호
눈 1
무겁게도 흐리진 머리털 아래의,
회색(灰色) 구름이 차게도 하늘을 덮은 듯한,
향(香)내의 흰 분(粉)에 얼굴을 파묻고 섰는
겨울의 아낙네여, 그리하고 애인(愛人)이여.
떠오르며 흩어지는 연기(烟氣)의
스러져가는 한 때의 옛 사랑을
무심(無心)스럽게도 바라보고 있는
담배를 피우는 애인(愛人)이여, 아낙네여
옅은 웃음을 띠우며
맘의 찬 입술을 깨물고 있는 애인(愛人)이여,
날은 흐린 어득한 십일월(十一月)의
고요한 저녁의 아낙네여.
애인(愛人)을 버리고 가려는 애인(愛人)이여,
두꺼운 목도리를 둘러맨 아낙네여.
지금(只今)은 겨울, 올 겨울에도 눈오는 때,
말하여라, 한 송이 두 송이 눈이 내리나니,
하염없이도 땅위에 내리는 눈,
사랑과 사랑을 둘러싸는 눈,
그리하여 눈속에서 맘과 맘은 잠들었어라.
눈 2
황포(黃浦) 바다에
내리는 눈은
내려도 연(連)해
녹고 맙니다.
내리는 족족
헛되이 지는
황포(黃浦)의 눈은
가엽습니다.
보람도 없는
설운 몸일래
일부러 내려
녹노랍니다.
달과 함께
조는 듯한 등(燈)불에 덥히운
권태(倦怠)의 도시(都市)의 밤거리에
고요하게도 눈은 내리며 쌓여라.
인적(人跡)은 끊기고
눈이 멎을 때,
보라, 이러한 때에, 깊고도 넓은
끝도 없는 밤바다에
하얗게도 외로운 빛을 놓으며,
돌던지기
1
그대의 맘은 알 길 없고
고요히 돌아서서
잔돌 집어 물에 던지니
물살은 희룽희룽
둥그렇게 넓어만 지고
2
고요한 나의 맘바다에
어쩌자 그대 돌 던졌는가
물결은 미칠 듯 감돌며
끝없이 파문(波紋)을 헤치거니
때
때의 흐름으로 하여금
흐르는 그대를 흐르게 하여라,
격동(激動)도 식히지 말으며,
또한 항거(抗拒)도 말고
그저 느리게, 제 맘에 맡겨
사람의 일되는
설움의 골짜기로 스며 흘러
기쁨의 산(山)기슭을 여돌아,
넓다란 허무(虛無)의 바다속으로
소리도 없이 고요히 흐르게 하여라.
그리하고 언제나
제 맘대로 흘러가는 ‘때’ 그 자신(自身)으로 하여금
너의 앞을 지나게 하여라.
먼 후일(後日)
사나이의 생각은 믿기 어렵고
아낙네의 사랑은 변키 쉽다고
우리들은 모두 다 한숨지우나
먼 후일(後日)에는 그것조차 잊으리
무심(無心)
평양(平壤)에도 대동강(大同江) 나간 물이라
생각을 애에 말까
해도 그리워
다시금 요 심사(心思)가 안타까워서
이 가슴 혼자로서 쾅쾅 칩니다.
얄밉다 말을 할까
하니 얄밉고,
그립다 생각하니 다시 그리워
생시(生時)랴 꿈에서랴 잊을 길 없어
억울한 요 심사(心思)에 내가 웁니다.
공중(空中)을 나는 새도 깃을 뒀길래
오갈 제 산(山)을 싸고
돌지 않던가
못잊어 원수라고 속이 상킬래
이 가슴 혼자로서 부숴댑니다.
물레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어제도 오늘도 흥(興)겨이 돌아도
사람의 한 생(生)은 시름에 돈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외마디 겹마디 실마리 풀려도
꿈같은 세상(世上)은 가두새 얽히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언제는 실마리 감자던 도련님
인제는 못 돌아 날 잡고 운다오.
물레나 바퀴는
실실이 시르렁
원수의 도련님 실마리 풀어라
못 풀 걸 왜 감고 날더러 풀라나.
바다를 건너
바다를 건너, 푸른바다를 건너
저 멀리 머나먼 바다 저편(便)으로
그윽하게 보이는
흰돛을 달고 가는배……
바다를 건너, 푸른바다를 건너
머나먼 저 바다의 수평선(水平線)우으로
끊임없이 홀로 가는
언제나 하소 많은 나의 꿈……
바다 저 편(便)
바다를 건너, 푸른 바다를 건너
저 멀리 머나먼 바다의 저 편(便)에
그윽하게도 보이는
흰 돛을 달고 가는 배, ……
바다를 건너, 푸른 바다를 건너
머나먼 저 바다의 수평선(水平線) 위로
끊지도 아니하고 홀로 가는
언제나 하소연한 나의 꿈, ……
배
끝도 없는 한바다 위를
믿음성도 적은 사랑의 배는
흔들리우며, 나아가나니,
애닯게도 다만 혼자서,
그러나마 미소(微笑)를 띠우고
거칠게 춤추는
푸르고도 깊은 한바다의 먼 길을
사랑의 배는 나아가나니,
아아 머나먼 그 끝은 어데야.
희미한 달에 비치어 빛나며, 어두운
끝모를 한바다 위를 배는 나아가나니.
버들가지
무심(無心)타 봄바람에
꽃은 폈다가,
헛되이 그 바람에
지고 맙니다.
서럽지 않을까요,
젊으신 서관(西關) 아씨.
오늘도 능라도(綾羅島)라,
버들개지는
물위를 혼자 돌다
흘러갑니다.
가엽지 않을까요,
젊으신 서관(西關) 아씨.
별 낚기
애인(愛人)이여, 강(江)으로 가자, 지금(只今)은 밤, 낚아질 때다.
애인(愛人)이여, 거리로 가자, 지금(只今)은 밤, 낚아질 때다.
어두운 강(江) 위에는 빛나는 별이 반듯인다.
어두운 거리에는 빛나는 등(燈)불이 반듯인다.
애인(愛人)이여, 강(江)으로 가자, 지금(只今)은 밤, 낚아질 때다.
애인(愛人)이여, 거리로 가자, 지금(只今)은 밤, 낚아질 때다.
애인(愛人)이여, 강(江) 위에서 고요히 별을 낚으자.
애인(愛人)이여, 거리에서 고요히 불을 낚으자.
애인(愛人)이여, 지금(只今)은 밤, 강(江)으로 가자, 낚아질 때다.
애인(愛人)이여, 지금(只今)은 밤, 거리로 가자, 낚아질 때다.
낚을 것 같으면서도 암만해도 못낚을 별.
잡을 것 같으면서도 암만해도 못잡을 불.
애인(愛人)이여, 지금(只今)은 밤, 강(江)으로 가자, 낚아질 때다.
애인(愛人)이여, 지금(只今)은 밤, 거리로 가자, 낚아질 때다.
낮이 되면 별은 숨고 만다.
낮이 되면 불은 꺼지고 만다.
애인(愛人)이여, 너는 밤의 강(江) 위에 빛나는 별
애인(愛人)이여, 너는 밤의 거리에 빛나는 불.
너의 맘은 낚을 것 같으면서도 못 낚을 별.
너의 맘은 잡을 것 같으면서도 못 잡을 별.
애인(愛人)이여, 지금(只今)은 밤, 강(江)으로 가자, 낚아질 때다.
애인(愛人)이여, 지금(只今)은 밤, 거리로 가자, 낚아질 때다.
너의 맘은 낮이 되어도 숨을 줄 모르는 별.
너의 맘은 낮이 되어도 꺼질 줄 모르는 불.
봄바람
하늘하늘
잎사귀와 춤을 춥니다
하늘하늘
꽃송이와 입맞춥니다
하늘하늘
어디론지 떠나갑니다
하늘하늘
떠서 도는 하늘바람은
그대 잃은
이내 몸의 넋두리외다
봄비
봄날 저녁에 내리는 비는
보슬보슬 고요도 합니다.
마을 앞에 버들가지에는
어린 움이 눈을 내입니다.
연(蓮)못 가의 개나리 가지엔
꽃봉오리가 떨어집니다.
봄날 저녁에 내리는 비는
보슬보슬 고요도 합니다.
봄은 간다
밤이도다
봄이도다
밤만도 애닯은데
봄만도 생각인데
날은 빠르다
봄은 간다
깊은 생각은 아득이는데
저 바람에 새가 슬피운다
검은 내 떠돈다
종소리 빗긴다
말도 없는 밤의 설움
소리 없는 봄의 가슴
꽃은 떨어진다
님은 탄식한다.
비
포구 십리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날의 한 나절을
모래알만 울려 놓았소.
기다려선 안 오다가도
설은 날이면 보슬보슬
오늘 같이
만나도 못코 떠나버린
그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은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魚泳島)라 갈매기 때도
지차귀가 축축히 젖어
너훌너훌 날아를 들고
자취없는 물길 삼백리
배를 타면 어데를 가노
남포 사공 이 내 낭군님
어느 곳을 지금 헤매노.
사계(四季)의 노래
고운 생각 가득한 나물광주리를 옆에 끼고
인생(人生)의 첫 이슬에 발을 적시는 봄철의 따님이여,
꽃을 우랴는 고운 바람에, 그대의 보드람은
가슴의 사랑의 꽃봉우리는 지금(只今) 떨고 있어라.
미칠듯한 열락(悅樂)에 몸과 맘을 다 잊고 뛰노는
황혼(黃昏)의 때 아닌 졸음을 그리워하는 여름의 맘이여,
행복(幸福)의 명정(酩酊), 음울(陰鬱)의 생각은 지금(只今) 그대를 둘러싸고
끝없는 꿈으로 병인(病因)한 ‘인생(人生)’을 곱게 하여라.
빛깔 없게도 고개를 숙이고, 묵상(黙想)에 고요한 가을이여,
냉락(冷落)을 소군거리는 낙엽(落葉)의 비노래가락은
들을 거쳐, 넓다란 맘의 세계(世界)에도 빗겨들어,
곳곳마다 ‘죽은 맘’의 장사(葬事)에 한갓 분주하여라.
흰옷을 입고, 고요히 누웠는 겨울의 베니스 여신(女神)이여,
건독(乾毒)만 남고, 눈물 흔적조차 없는 너의 눈가에는
아무리 잃어진 애인(愛人)을 그립게 찾는 빛을 띠었어도
쓸데조차 없어라, 한때인 사랑은 올 길이 없어라.
사랑의 때
첫째
어제는 자취도 없이 흘러갔습니다,
내일(來日)도 그저 왔다가 그저 갈 것입니다,
그러고, 다른 날도 그 모양으로 가겠지요,
그러면, 내 사람아, 오늘만을 생각할까요.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고운 웃음도 잠깐 동안의 꽃이지요.
때는 한 동안 기쁨의 꽃을 피웠다가는
두르는 동안에 그 꽃을 가지고 갑니다,
곱고도 설건만은 때의 힘을 어찌합니까,
그러면, 내 사람아, 오늘만을 생각할까요.
즐거운 때를 아끼지 않아야 합니다,
고운 웃음도 잠깐 동안의 꽃이지요.
둘째
물은 밤낮으로 흘러내리고
산(山)은 각각(刻刻)으로 무너집니다,
세상(世上)의 곱다는 온갓 것들은
나날이 달라가며 스러집니다.
그러면, 내사람아, 우리는
사랑과 함께 춤을 출까요.
아름다운 이 세상(世上)의 사랑에
몹쓸 때가 설움의 종자(種子)를 뿌립니다,
이 종자(種子)의 음을 따서 노래부르면
도리어 사랑을 모르던 옛날이 그립습니다.
그러면, 내 사람아, 우리는
사랑도 그만두고 말까요.
상실(喪失)
가을의
샛말간 하늘에
한 조각의 검은 구름이
무슨 일이나 생긴 듯이,
뜨다가는 스러지고
스러졌다가는 뜨고는 한다.
고요한 나의 맘바다의
고요한 한 복판에는
이름모를 무엇이
무슨 일이나 생긴 듯이,
구슬프게도 다만 혼자서
잔 물살을 내이고 있다.
신작로(新作路)
행객(行客)은 오고가고 가고옵니다.
자욱은 자욱밟아 티끌이외다,
바람부니 그나마 티끌 납니다.
님이어, 이 한 생(生)은 신작로(新作路)외까.
신작로(新作路)는 이내 맘 분주도 하이
밤낮으로 행객(行客)은 끊일 때 없네,
먼지 속에 발자욱 어지러우니
꿈타고 지내신 님 어이 찾을고.
행(幸)여나 님 오실까 닦은 신작로(新作路)
낯설은 행객(行客)들만 뭐라 오갈고
쓸데없는 자욱에 먼지만 일고
기두는 님 행차(行次)는 이 날도 없네.
신작로(新作路)엔 자동차(自動車) 달아납니다,
길도 없는 바다를 배는 갑니다,
빈 하늘 푸른 길엔 새가 납니다,
임이여 어느 길을 저는 가리까.
저기서 풀밭 속에 길 있습니다
외마디 자욱길로 어지럽쇠다,
아무도 안다니어 고요하외다,
임이여, 가십시다, 저 길이외다.
실제(失題)
내 귀가 님의 노래 가락에 잡혔을 때에
그대가 고운 노래를 내 귀에 보내었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노래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 눈이 님의 맘의 꽃밭에서 노닐 때에
그대가 그대의 맘의 꽃밭으로 오라고 하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맘의 꽃밭은 보이지 않습니다.
내 입이 님의 보드라운 입술과 마주칠 때에
그대가 그대의 보드라운 입술로 불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입술은 닫히어지지 않았습니다.
내 코가 님의 스며나는 향(香)내에 취(醉)하였을 때에
그대가 그대의 스며나는 향(香)내를 보내었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향(香)내는 맡아지지 않았습니다.
내 꿈이 님의 무릎위에서 고요하였을 때에
그대가 그대의 무릎위로 내 꿈을 불렀습니다.
만은 조금도 그 꿈은 깨지를 못하였습니다.
지금(只今) 내 맘이 깨어 두번 그대를 찾을 때에는
찾는 그대는 간 곳이 없고 임만 남았습니다,
아아 이렇게 살림은 밤낮으로 이어졌습니다.
십일월(十一月)의 저녁
바람에 불리우는
옷 벗은 나무수풀로
작은 새가 날아갈 때,
하늘에는 무거운 구름이 떠돌 며
저녁해는 고요히도 넘어라.
고요히 서서, 귀 기울이며 보아라,
어둑한 설은 회한(悔恨)은 어두워지는 밤과 함께,
안식(安息)을 기다리는 맘 위에 내려오며,
빛깔도 없이, 핼금한 달은 또다시 울지 않는가.
나의 영(靈)이여, 너는 오늘도 어제와 같이,
혼자 머리를 숙이고 쪼그리고 있어라.
우정(友情)
사랑은 저문 봄날의 꽃보다도 가이 없고,
우정(友情)은 술잔에서 술잔으로 떠돌아가며
거짓의 울음과 값없는 웃음을 흘리다가는
어리운 담뱃내보다도 더 쉽게 스러지나니,
다음에 남는 설움이야 한(限)이나 있으랴.
사람아, 기운(氣運)있게 인생(人生)의 길을 밟는 우리의
맘과 맘과는 한번(番)조차 맞은 적이 없어라,
그러면, 늦은 봄날의 꽃도 지는 이 저녁에
나는 떠돌아가는 술잔을 입에 대이고
우정(友情) 가득한 그대의 얼굴을 혼자 보며 웃노라.
원산(元山)서
하이얀 흰 돛대는
넓은 바다 동해(東海)의
저 먼 곳에 떠돌고,
하이얀 흰 구름은
가없는 넓은 하늘
방향(方向) 없이 헤맬 제,
바닷가 모래밭 위
푸른 양산(陽傘) 아래선
누구를 기다릴까,
젊은 아씨 혼자서.
읽어지는 기억(記憶)
고요한 밤의, 고요히 쉬는 바다 위에
반듯거리는 별의 희미한 빛과도 같이,
아름다운 여름의 온갖 빛을 다 잃은
있을 듯 말 듯한 향(香)내를 놓는 꽃의 맘이여.
뒤설레는 바람의 하룻밤을 시달린
명일(明日)이면 말라 없어질, 생각의 꽃의
떨면서 헤치는 적은 향(香)내를
곱게도 맡으며, 바리운 맘이여, 사랑하여라.
입
온갖의 화병(禍病)은 입으로 들어가고,
온갖의 화복(禍福)은 입에서 생겨라,
그러하다, 나의 이 입으로 읊어진 노래는
세기(世紀) 끝에 생기는 Malady(멜라디)의 쓰린 신음(呻吟),
사랑의 사체(死體)를 파묻는 야릇한 숨소리러라.
전원(田園)의 황씨(黃氏)
집이면 집마다 떠오르는 연기(烟氣),
서(西)녘 하늘에는 곱게도 물들인 붉은 구름,
공중(空中)으로 올라서는 헤매며 스러질 때,
나무가지에서는 비둘기가 울고 있어라.
안개는 숲속에서 생기는 듯이 스미어서는
조는 듯 고요히 누운 넓은 들을 덮으며,
어두워가는 밤속에서 새 꿈을 맺으려는
촌락(村落)에는 들벌레 소리가 어지러워라.
이리하야 핼금한 둥그런 달이
하염없는 곤피(困疲)의 걸음을 이을 때,
나무 아래에는 시비(是非)도 없는 농인(農人)의 한담(閒談),
저 산(山)기슭의 교회당(敎會堂)에서는 찬송의 노래,
깊어만 가는 밤에는 이것밖에
아무 것도 들림 없이 고요하여라.
조약돌
하소연 많은 열여덟 이내 심사(心思)
풀을 길 없이 선창(船倉)가 홀로 나가
하나둘 조약돌을 모으노라면
어느덧 여름날은 넘고 맙니다.
떠도는 배는 한바다의 저 먼 곳
외대백이 흰 돛대 행(幸)여 보일까
손작란(作亂) 삼아 조약돌 헤노라면
어느덧 외대백이 잊고 맙니다.
참살구
고소한 참살구씨라고
서로 아껴가며 짜먹던 것이,
나중에는 두알밖에 안남았을 때에
이것은 심었다가 종자(種子)를 하자고,
네 살 위되는 누이님이 나를 권(勸)했소.
살구씨를 심은 지가 몇 해나 되었는지,
해마다 진달래꽃이 진 뒤에는
그 살구나무에 하얀 꽃이 피게 된 지도 오래었소.
맛있는 참살구라고
어린 동생(同生)들을 귀(貴)해 하며,
해마다 늦은 보리가 익었을 때에
그들은 종자(種子)하자는 말도 없이,
야단을 하면서 번(番)갈아 따먹소.
누이님이 돌아가신 지 몇 해나 되었는지,
해마다 살구꽃이 진 뒤에는
그 무덤에 이름모를 꽃이 피게 된 지도 오래었소.
코스모스
하이얀 코스모스 혼자 피어서
늦가을 찬 바람에 시달리우네
불서러운 그 경상(景狀) 하도 애연해
손잡으니 가엽다, 꽃지고 마네.
탄 실 이
지나간 삼월(三月)에 이별(離別)한
평양(平壤) 탄실이는
아직도 나를 믿고
그대로 있을까.
바람에 떠서 도는
뜬 몸이길래
살뜰이도 못 내그려
예도록 안 잊힌다.
예도록 안 잊는 몸을
불쌍이나 생각하고
아직도 탄실이는
그대로 있을까.
탈 춤
여러분, 살음의 즐거움을 맛보려거든,
‘도덕(道德)’의 예복(禮服)과 ‘법률(法律)’의 갓을 묘(妙)하게 쓰고
다 이곳으로 들어옵시요, 이곳은
인생(人生)의 ‘이기(利己)’의 탈춤 회장(會場)입니다.
춤을 잘 추어야 합니다, 서툴러 넘어지면
운명(運命)이라는 놈의 함정(陷穽)에 들어갑니다,
하면 ‘행복(幸福)의 명부(名簿)’에서는 이름을 어이며,
다시는 입장권(入場券)인 인생관(人生觀)을 얻지 못합니다.
인생(人生)은 짧고 춤추는 시간(時間)은 깁니다,
한 분(分)만 잃으면, 한 분(分)만큼한 행복(幸福)의 춤이
없어지게 됩니다, 선(善)은 빨리 해야 합니다.
자 그러면 빨리 춥시다, 좋다 좋다, 얼씨구
풀밭 위
맡으면 향(香)내나는 풀밭 위에
황금색(黃金色)의 저녁볕이 춤추며
들벌레소리가 어지러울 때,
또다시 나는 혼자 누워서
구름끝에 생각을 보내고 있노라.
떠서는 잠겨드는 심사(心思)와도 같이
저 멀리 구름 속에 이동(移動)이 잦을 때,
어디선지 저녁 종(鐘)이 빗겨 울리어,
저 멀리 먼 곳으로 야속케도 심사(心思)가 끌려라.
달은 혼자서 방향(方向) 없이 아득이면서
하늘길을 걷고 있어라.
고요한 밤거리에는
잃어진 꿈과도 같게
곱게도 등(燈)불이 졸고 있어라.
피 리
빈 들을 휩쓸어 돌으며,
때도 아닌 낙엽(落葉)을 최촉(催促)하는
부는 바람에 좇기어,
내 청춘(靑春)은 내 희망(希望)을 버리고 갔어라.
저멀리 검은 지평선(地平線) 위에
소리도 없이 달이 오를 때,
이러한 때에 나는 고요히 혼자서
옛 곡조(曲調)의 피리를 불고 있노라.
해마다 생각나는
해마다 연분홍 살구꽃이 피어
가없는 봄맘이 끌릴 때가 되면
다시금 안 잊히는 실없던 작란(作亂),
때는 사월(四月)의 아름다운 어느 날,
동무들과 꽃밭에 나는 갔노라.
어이하랴, 고운 꽃 냄새 맑길래,
한송이 꺾어 손에다 들었노라,
그러나 얼마 안해 꽃은 시들고
냄새만 한갓되이 남돌던 것을.
황해(黃海)의 첫봄
1
양지(陽地)귀 잔디밭에
속잎 푸르고
바다엔 얼음 풀려
오가는 흰 돛
어야데야 배소리
하늘에 찼소
하늘 중천(中天) 내 천자(川字)
행렬(行列)을 지어
넓은 들을 날도는
기럭 그기럭
기러기는 왔노라
잘도 울것다.
2
십리포구(十里浦口) 질펀타
두둥실 뜬 배
고기잡이 노래에
포구(浦口) 아씨네
제 속은 딴 데 두고
웃지만 마소
무심(無心)타 갈매기도
한(限)껏 목놓아
여저기 노래노래
쌍쌍(雙雙)이 돌며
새라 새 봄 제 흥(興)에
잘도 놀것다.
오다가다
오다가다 길에서 만난 이라고, 그저 보고 그대로 예고 말 건가. 산에는 청청(靑靑) 풀잎사귀 푸르고 해수는 중중(重重), 흰 거품 밀려든다. 산새는 리리 제 흥을 노래하고 바다엔 흰 돛 옛길을 찾노란다. 자다깨다 꿈에서 만난 이라고 그만 잊고 그대로 갈 줄 아는가. 십리포구(十里浦口) 산 넘어 그대 사는 곳, 송이송이 살구꽃 바람에 논다. 수로천리(水路千里) 먼 길을 왜 온 줄 아나? 옛날 놀던 그대를 못 잊어 왔네.
비
포구십리(浦口十里)에 보슬보슬 쉬지 않고 내리는 비는 긴 여름날 한나절을 모래알만 울려놓았소
기다려선 안 오다가도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만나도 못코 떠나버린 그 사람의 눈물이던가
설운 날이면 보슬보슬 어영도(魚泳島)라 갈매기 떼도 지차귀가 촉촉히 젖어 너훌너훌 날아를 들고
자취 없는 물길 삼백리 배를 타면 어데를 가노 남포(南浦) 사공 이내 낭군님 어느 곳을 지금 헤매노
눈 올 때마다 어린적 겨울 밤에 옛날 듣던 이야기. 송이 송이 흰 눈은 산(山)과 들에 퍼 불제 다스한 자리속에 찬 세상(世相)도 모르고―. 다같이 맡은 세상(世上) 고로이 다스리매 귀(貴)여워라, 산(山)새는 노래로 공중(空中) 날고 고기는 넓은 바다 맘대로 헴치느니. 사공의 아내 하늘에 홀로 계신 전능(全能)하신 하느님 모두다 살피시며 죄(罪)와 벌(罰) 나리시매 세상(世上)은 평화(平和)스레 이렇듯 일없느니. 거울 보니 아니라 얼굴도 주름 졌네 까닭스런 세고(世苦)에 부대낀 탓이런가 나는 지금(只今) 비로소 이 인생(人生)을 묻노라. 전능(全能)한 하느님도 본색(本色)이 드러났네, 빈 하늘 내 천지(天地)라 비행기(飛行機) 높이 날 제 이 지상(地上) 볼지어다 하루나 평안(平安)한가. 늙으신 어머님은 손자(孫子)를 데리시고 북방(北邦)의 같은 겨울 눈 쌓인 칩은 밤에 아직도 그 이야기 되풀이 하실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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