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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rn/맛&가볼만곳

☞길

그 많은 이야기들이 잠겨 있는 삼척엘 갑니다. 실직국의 전설을 따라서, 신라 장군 이사부의 행로를 따라서, 삼국유사 속 수로부인에게 꽃을 건네던 늙은이를 따라서 걷는 길입니다. 먼 시간 저편 신화와도 같은 이야기들은 다 삭아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고, 수로부인이 건네받았다는 철쭉도 아직 피려면 멀었습니다. 그럼에도 삼척을 찾아가는 것은 마치 역사의 행로처럼 흩어졌다가 다시 모이고, 다시 흩어지기를 반복하는 삼척의 길은 늘 그렇듯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입니다.

삼척에는 도처에 길이 얽혀 있습니다. 근래에 만들어진 '관동팔경을 따라가는 녹색경관길'이 있고, '해파랑길'이 있으며 '산소길'이 있습니다. 여기다가 구불구불 해안을 달려가던 옛 7번 국도도 있습니다. 서로 만나기도 하고 흩어지기도 하는 이 길은 모두 다 타박타박 걷는 길입니다. 파도가 힘차게 일어선 해안을 걷기도 하고, 고즈넉한 바닷가 마을 언덕을 넘기도 합니다. 때로는 신화와 같은 역사와 켜켜이 쌓인 이야기를 관통합니다. 숨가쁘게 오르는 산길도 있고,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해안길도 있습니다.

삼척의 그 길들을 하나하나 짚어봤습니다. 한때 번창했던 포구의 영화를 굽어보는 자리에 올라서 시야 가득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능선길을 걷기도 했고, 이제 막 얼음이 풀린 계곡을 따라 물소리를 들으며 산중의 길을 따라 오르기도 했습니다. 지자체가 저마다 이어 붙여 경쟁적으로 만들어낸 길의 행로를 지도 삼아서 따르긴 했으되, 다 걷고 나서는 곧 그게 부질없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봄볕이 기웃거리고 있는 이즈음 삼척에서는 해안가나 숲길 어디서든지 그저 걷기 시작하면 그게 길이 되는 까닭입니다. 지도 한 장 없어도 그저 해안을 따라 내키는 대로 걷기만 해도 삼척에서는 훌륭한 도보여행을 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요.

 

 

↑ 강원 삼척 임원항 뒤편 남화산 정상 부근. 길게 바다 쪽으로 내민 야트막한 구릉의 능선을 따라 걸을 때 시선이 닿는 좌우가 모두 푸른 바다다. 마치 바다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 같은 착각이 드는 매혹적인 길이다.

 

'실직국'이라니 혹 '실직(失職)'을 먼저 떠올리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직장을 잃는다'는 뜻이 아니라 '모두 실(悉)'자에 '곧을 직(直)'자를 쓰는 '실직(悉直)'이랍니다. 강원 삼척에서 번성하다가 1900여년 전 신라에 복속돼 사라지고 말았다는 고대 국가의 이름이 그랬습니다. 그리고 400년 뒤. 삼척에서는 신라 장군 이사부가 나무로 깎은 사자를 배에 싣고 울릉도와 독도를 정벌하러 나섭니다. 거기서 또 200여년의 시간이 지나면 이곳 바닷가 벼랑을 걷던 수로부인에게 소를 몰고 가던 늙은이가 철쭉꽃을 바치며 이런 노래를 불렀습니다. "자줏빛 바위 끝에/ 잡으신 손/ 암소 놓게 하시고/ 나를 아니 부끄러워하시면/ 꽃을 꺾어 바치오리다." (헌화가)

 

[해파랑길]

 


[화천 산소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