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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rn/나무&꽃

울진 왕피천 가의 ‘삿갓소나무’

 

 

 

 

 

 

 

 

1999.4.6 지정
경북 울진군 근남면 행곡리 672


효자와 쌀 창고의 전설을 간직한 울진 왕피천 가의 ‘삿갓소나무’

동해안을 따라 뻗은 7번 국도는 우리나라 대표적인 명소로 꼽힌다. 망망대해에서 밀려드는 파도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일상의 스트레스라는 찌꺼기를 털어 버릴 수 있어서다. 기나긴 7번 국도의 가운데쯤, 울진읍의 바로 아래에서 36번 도로를 타고 불영계곡 쪽으로 5km 거리의 왕피천 가에 자라는 소나무 한 그루를 만나러 가본다.
왕피천에 걸린 천전교를 건너면 마을 입구에 자그마한 효자각을 감싸듯이 품고 있는 소나무 한 그루가 금방 눈에 들어온다. 가슴높이 둘레 3.0m, 높이 11.0m, 동서 및 남북의 가지 뻗음이 각각 14m 정도이다. 나뭇가지가 옆으로 뻗는 것이 아니라 능수버들처럼 아래로 쳐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이 나무의 정확한 이름은 소나무의 한 품종으로 분류되는 처진소나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처진소나무가 3곳이나 더 있지만, 다른 어떤 나무보다 단아하면서도 기품이 있어 보인다. 보는 방향에 따라 조금씩 모양새가 다르기는 해도 전체적으로 삿갓모양의 곡선미가 돋보이기 때문이다. 잠시 눈을 감으면 마치 방랑시인 김삿갓이 왕피천을 바라보면서 시한수를 읊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삿갓소나무란 이름이 더 어울릴 것 같다.
나무가 자라는 곳은 행정구역상으로는 울진읍 행곡2리, 옛 이름은 ‘내앞’이라는 뜻의 천전(川前)마을이다. 왕피천을 따라 만들어진 널찍한 충적토 들판은 예부터 사람들이 모여 사는 마을을 이루었다. 기나긴 세월동안 마을 사람들의 삶의 흔적으로 남아있는 곳이 바로 이 소나무와 함께 있는 효자각이다.
왕피천을 옆에 끼고 있는 마을은 예부터 홍수 대비를 철저히 해야 했다. 지금처럼 튼튼한 제방을 쌓을 수는 없으니, 대체로 이런 곳에는 물이 마을로 넘어오는 것을 일부나마 막아줄 나무 심기가 필요했다. 뿌리가 깊이 들어가고 떼거리를 이루기를 좋아하는 소나무가 제격이다. 사람들은 대를 이어 오면서 소나무를 심고 가꾸어온 탓에 천전마을 입구에는 늘어선 솔밭이 마을을 지켜주고 있었다. 18세기 말인 조선 정조 때 쯤 이 마을에는 주명기라는 한 사내아이가 태어난다. 그는 자라면서 효자로 소문이 자자하였다. 전신을 거의 움직이지 못하는 아버지의 병 수발에 정성을 다하고, 겨울에 어름을 깨고 붕어를 잡아 죽을 끓여드렸으며 심지어 손가락을 끊어 피를 들게 하는 효성도 했다. 효자로 소문나자 순조8년(1808) 나라로부터 마을 앞에 정여(旌閭)라는 효자각을 솔숲에다 세울 수 있은 허락을 받는다. 충과 효는 유교국가 조선의 최고 덕목이니 나라에서 직접 효자를 챙기기도 한 것이다. 세월이 흘러 1960년대의 어느 날, 현대적인 제방이 만들어 지면서 욕심 많은 사람들은 솔숲에 눈독을 들인다. 결국 마을 지킴이로 아껴온 솔숲은 효자각과 달랑 이 소나무 한 그루만 살아남고 몽땅 잘려나가 버린다. 원래 이 일대는 똑바르게 하늘로 치솟은 금강소나무의 집단서식지이다. 미끈하고 잘 생긴 주위의 친구 나무들은 잘려져 도시로 팔려가 버렸다. 삿갓을 쓰고 있는 모습의 처진소나무라는 특별한 혈통을 타고 난 탓에 용케도 이 나무만은 톱날을 피할 수 있었다. 지금의 추정 나이는 약 250년, 효자각 세울 당시 4~50년 쯤 되었다고 짐작된다. 효자 효부각은 전국 어디에서나 흔히 만날 수 있지만 특별한 소나무와 함께하는 탓에 의미가 크다.

이외에 이 일대는 또 다른 전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왕피천 건너 처진소나무로 들어가기 직전 지금의 36번 도로 북쪽, 행곡1리에는 천량암(天糧蓭)이란 암자 터가 있다. 원효대사가 여기에 머무를 때 작은 바위구멍에서 아침저녁으로 두되 가량의 쌀이 나왔다고 한다. 그래서 옛 이름은 미고(米庫)이다. 사람들은 쌀 창고란 뜻으로 ‘쌀고’라고 했는데 ㅆ 발음이 잘 안 되는 이곳 사람들 입에서 ‘살고’로 부르다가 변하여 나중에는 ‘살구’가 되었다. 일정 때 행정구역 개편을 하면서 한자식으로 마을이름을 정할 때 엉뚱하게 살구나무 계곡, 행곡리(杏谷里)가 되었다고 한다. 아쉽게도 원효대사 이후 암자를 맡은 한 욕심 많은 중이 쌀이 많이 나오라고 구멍을 넓혔더니 아예 쌀 나오기가 멈춰버렸다는 것이다. 또 마을에는 1917년경 설립된 행곡교회가 있다. 울진군 최초의 침례교회이며 한옥모양의 건물은 경북 등록문화재 28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나무를 처음 찾아간 이들은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음에 실망한다. 그러나 효자각에 얽힌 이야기가 나뭇가지에 서려있고 강 건너 천량암의 전설을 바람결에 들을 수 있어서 뜻 깊은 나무다. 처진소나무라는 생물학적인 의미와 옛 사람들의 삶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전통나무로서 문화적인 값어치도 커서 천연기념물 반열에 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