河西선생 시
1
風送微雲積雨收 풍송미운적우수
當軒凝黛數峰抽 당헌응대수봉추
花驚春晩紅飇雪 화경춘만홍표설
竹弄寒聲碧碎秋 죽롱한성벽쇄추
바람이 옅은 구름을 보내고 오랜비를 거두니 난간앞에 짙푸른 빛 엉기고 몇 봉우리 보이네
꽃은 가는 봄에 놀라 붉은 꽃 눈송이 흩날리고 대는 찬소리 놀라며 파란 가을 부스듯 푸르네
2
宿瀟灑院文房 其三 怡然一室中 生事何須問 壁裏有陶詩 無人知遠韻 贈景任 경임에게 지어 주다 共學期鴻業 큰 사업을 기약하며 함께 배우고 相知許寸心 서로 알아주며 하락했지. 我培要有意 심고 또 북돋우기에 마음 써야 하니 未茂在根深 뿌리가 다져져야 가지 무성하다네. 3 十年奔走長安道 십년동안 분주히 長安 길에서 보냈는데 利名關人不知老 名利에 얽매여 늙는 줄도 몰랐네 紛紛過眼數榮枯 몇 번의 榮枯盛衰 紛紛히 지나가니 秋菊未晩春蘭早 秋菊도 늦음이 없고 春蘭은 일찍 피는구나 何如一醉臥北窓 어찌 한번 醉하여 北窓가에 누웠는데 滿目風光隨處好 눈에 가득 좋은 경치 곳마다 아름답도다 世上眞樂此爲甚 세상 참다운 즐거움 이보다 좋은 것 없고 太山秋毫可相倒 太山같고 秋毫같은 것이 함께 움직이도다. 百千蚊蚋起復滅 수많은 모기떼가 날아왔다 사라지니 何用區區擾我抱 苟且히 애쓰며 내 마음 어지럽히려 하는가 豈念云云諧笑煩 雜多히 생각하며 어찌 시끄럽게 농담하여 웃는가 性情賴此方浩浩 性情이 이 때문에 바야흐로 넓어지고 있는데 逸興如雲驅萬類 구름에 오른듯 아주 흥겨워 모든 얽매임 몰아내니 不啻勁箭投魯縞 엷은 비단에 강한 화살 쏠 뿐만이 아니다. 男兒事業在遠大 男兒의 事業은 遠大함에 있으니 安能埋沒隨百草 어찌 百草따라 埋沒되겠는가 龍蟠自可致雲雨 龍 서리면 저절로 비구름 낄 것이니 肯向人間歌懊惱 인간 세상 향해 苦惱하고 恨歎하며 노래 부르리라
하서 초상
김인후(1510~1560)의 자는 후지(厚之)요, 호는 하서 혹은 담재이다. 본관은 울산.
1510년(중종 5)에 장성현 대맥동리(지금의 장성군 황룡면 맥동리)에서 태어나
1560년(명종 15)에 5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어려서 부터 장성의 신동이요 천하 문장이라는 소리를 들으며 크다가
18세 때에 기묘사화로 동복(지금의 전남 화순)에 귀양와 있던
신재 최산두(1483~ ?)를 찾아가 학문과 삶의 자세를 배운다.
22세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34세 때에는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가 되어
세자 시절 인종을 가르치게 된다.
35세 때 인종은 중종을 이어서 왕위에 올랐으나 이듬해 갑작스럽게 승하한다.
하서는 인종의 승하를 계기로 모든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인 장성을 돌아와 후학에 힘쓴다.
사후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과 옥과의 영귀서원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하서집' '주역관상편' '서명사천도' '백련초해' 등이 있다.
하서 김인후는 소쇄처사 양산보와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양씨가승집인 '소쇄원사실'의 기록에 따르면
"신재 최산두가 화순 동복 적벽에서 머물고 있을 때에
고향 장성에서 학문을 배우러 나아갔는데,
이때 하서는 반드시 소쇄원에서 쉬어갔다고한다.
또한 양산보와 도의지교를 맺어 자식들을 서로 혼인시켰는가 하면
소쇄원에 이르면 달이 넘도록 갈 것을 잊었다" 라고 기록되어 있다.
최산두는 기묘명현의 한 사람으로 하서가 18세에 그를 만났다.
최산두가 살고 있는 동복에 가기 위해서는 소쇄원 인근을 통해 가야 했는데,
하서는 양산보를 잊지않고 반드시 소쇄원을 오며가며 들렸던 것이다.
결국 둘은 사돈 관계가 되어 도의와 우정을 과시하였다.
따라서 16세기 당시 소쇄원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알았던 사람은 주인인 양산보였겠지만,
소쇄원을 시로 표현하여 나타내 보여준 사람은 바로 하서 김인후였다.
소쇄원과 관련된 시 중에서 가장 중심적인 작품은 바로 '소쇄원 48영'이다.
당호는" 元眞閣 "
ㅁ자 형 내부
하서 김인후를 상징한다는 이름하여 "상징필"
갈필로 보인다.
중종 26년(1531) 22세의 하서는 성균관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31에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가 되었다.
중종 38년(1543)에 홍문관 박사(정7품) 겸 세자시강원(세자를
보도하는 직책) 설서(정7품)로 발탁, 인종과 사제의 연을 맺게된다.
경영검토관(왕에게 옳은 말과 글을 강론하는 직책)이 되어 중종에게
백성이 잘 살고 나라를 부강케하는 왕도정치를 할 것과 기묘사화 때
억울하게 죽거나 귀향간 정암 조광조 등 어진 사람들을 용서하여 줄
것을 상소하고 조석으로 왕에게 강론하는 경연 석상에서 두 번이나
강력히 주청하였다.
기묘사화 후, 정치 사회적으로 누구도 말 하지 못했던 내용을 주청하니
중종은 크게 뉘우쳐 소학의 교육과 향악 보급을 허락하였으며
이어 인종 원년에는 기묘명현의 억울한 죄를 사 하고 모든 잘못된
폐습을 바로 잡게 된다.
선생의 서체
붓대는 옥으로 만들어졌고 벼루는 단계석이다
인종의 세자시절 세자시강원에서 글을 가르쳤던 하서
너무나도 존경했던 스승 하서에게 묵죽도를 그려 하사했다는 인종
그 묵죽도가 필암서원에 소장되어있다.
그런 인종이었는데 즉위 아홉달만에 그만 숨을 거두게된다.
곧바로 낙향한 하서는 다시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고한다.
인종이 서거한 7월 초하루가오면 어김없이 술병을 들고
근처 산에 올라 밤새도록 통음과 곡을 반복함을
평생 계속했다고.
책장과 앞닫이장
필암서원 서루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는 서장
(고종 년간에 제작되었을 것으로 본다고)
앞닫이는 1800년대 것으로 추정
필암서원 집강안 (보물 제 587호)
1 책 19 장
영조 28년에서 고종 24년간 필암서원의
소임을 맡아보았던 사람들의 명부
보불 제 587 - 13호 봉심록
인조 2년(1624)부터 숙종 27년(1701)까지
필암서원을 찾은 방문객들의 명단이다.
정조 20년, 1796년 10월 16일
선행의 시호를 文正으로 한다는 내용의 교지
시호를 문정으로 추증하고 정1품인
대광순후대부로 올린다는 내옹의 교지
정조 20년 1796년 9월 17일
이조판서에서 영의정으로 품계를 올려서 내린 교지
조선시대 서원의 교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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