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너울
조선시대에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쓰던 쓰개로는 너울·족두리·가리마 등이 있다. 너울은 조선시대 여자들의 쓰개 중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고려시대에 들어온 몽고의 유습으로 보인다. 유래에 대해서는 〈연려실기술 燃藜室記述〉 기호조(奇虎條)에 "천을 원립 위에 씌워 아래로 드리우며 얼굴 부분은 망사를 사용하여 앞을 투시할 수 있게 했다"고 하며 〈오주연문장전산五洲衍文長箋散稿〉고 에는 "궁녀들이 너울을 썼는데 그 종류는 푸른색, 검은색이 있고 직책에 따라 다른데 대개 검정색이 귀하고 푸른색은 천한 것이었다"고 전한다. 유교통치이념 속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를 강조하는 내외법(內外法)은 여자들로 하여금 함부로 남자들을 만날 수도 없거니와 친척조차 정해진 촌수 이외에는 만나지 않는 것이 상례였다. 외출할 때에는 반드시 너울 등으로 얼굴을 가려 상대편 남자들이 볼 수 없도록 했다.
2.쓰개치마
쓰개치마는 조선시대 상류층 부녀자들이 외출할 때 너울 대신 간편하게 사용한 내외용 쓰개이다. 형태는 치마와 같으나 길이가 치마보다 약30cm정도 짧고 폭도 좁았다. 붉은 색이나 옥색의 홑치마에 옥양목 허리를 달아서 이마에서부터 턱으로 돌린 후 머리위로 불룩한 주름을 만들어 썼으며, 허리에 달린 양쪽 끝을 턱밑으로 모아 흘러내리지 않도록 손으로 잡고 다녔다. 옥색옥양목이나 명주로 만들었으며 계절에 따라 겹으로 하거나 솜을 두기도 하였다. 여름철에는 사(紗)로 만들어 사용하기도 하였는데 아무리 더운 날씨라도 외출 시에는 반드시 쓰개치마를 사용하도록 하였다. 쓰개치마의 허리말기에 사용된 백색은 쓰개치마와 착용자의 의복색 사이에 분할선으로 개입되어 배색효과를 조절하는 역할을 한다. 백색의 개입은 양쪽 색을 선명하게 해주거나 부드럽게 하는 특징을 가지므로, 여인의 쓰개치마에 사용된 백색은 청결하고 화사한 색채이미지와 함께 청초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3.장옷
초기에는 서민 부녀자들만 사용했고, 후기로 오면서 양반집 부녀자들도 착용했으나 개화기를 맞아 여성의 활동이 자유로워지면서 사용하지 않게 되었다. 전체적으로는 두루마기의 형태와 같으나 옷깃, 옷고름, 겨드랑이의 삼각무 등이 다른 색으로 되어 있다. 유물로 남아 있는 장옷은 초록색 길에 깃과 고름은 자주색이고 소매 끝에 흰색의 거들지가 있다. 외출할 때는 앞머리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이마 위에서 턱 아래로 둘러 고름 부분을 잡을 뿐 소매를 팔에 끼우지 않는다. 조선 후기 장옷의 모습은 신윤복이나 김홍도의 풍속화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능화는 〈조선여속고 朝鮮女俗考〉에서 "평민의 처는 장옷을 썼다. 장옷은 초록색 명주로 지은 긴 옷으로 머리와 낯을 가리며 종아리까지 내려가는 것이다. 이 장옷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기록에 없으니 알 수 없다"고 했으나, 두루마기가 후기에 여자의 쓰개장옷으로 남게 된 것으로 보인다. 부녀자들의 장옷 착용 풍습은 나이에 관계없이 조선 말기까지 이어진 듯하며, 한말에 우라나라를 방문했던 제임스 게일은 〈코리언 스케치〉에서 "아줌마는 지금 예순 살이지만 아직도 거리를 다닐 때는 처녀와 마찬가지로 장옷을 입는다"고 적고 있다. 엄격한 내외법(內外法)의 전통사회에서 비롯된 장옷 풍습이 개화기 직전까지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제주도에서는 1960년대까지 혼례 때 장옷을 원삼·활옷 대신 입었고, 상례 때 수의로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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