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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공주 중동 성당

 

 



 

공주 중동 성당



공주 중동 성당 마당의 문화재 안내판,

성당 건물과 옛 사제관(현 교육관)이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등록되었다.



공주 중동 성당

국 고개라고 불리던 언덕 위에 자리한 공주 중동 성당은 서양 중세 때 유행하던 고딕 양식의 건물이다. 본래 이 중동 성당의 전신은 1897년 5월 8일에 설립된 공주 본당으로 110여 년의 역사를 갖고 있다. 그러나 공주 지방의 천주교 선교 역사는 이보다 훨씬 더 거슬러 올라갑니다. 1784년 이승훈이 중국 북경에서 세례를 받고 돌아온 후 복음의 씨앗은 권일신에 의해 천안사람 이존창에게 전파되었고, ‘내포의 사도’가 된 이존창은 공주 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중 1801년 신유박해 때 황새바위에서 순교했습니다. 또한 1866년 병인박해를 거치면서 성 손자선 토마스가 순교하는 등 공주 감영에서 치명한 순교자는 이름이 밝혀진 신자만 해도 248명에 이릅니다.



공주 중동 성당

1897년 4월 1일 프랑스인 기낭(Guinand, 진보안, 1872~1944, 베드로) 신부가 당시 공세리 본당 공소였던 요골 공소로 부임한 후 그해 7월에 성당 부지로 사들인 공주읍내 중심지인 강경골(현 소재지인 공주시 중동 31)로 진출하여 교회를 설정하였다. 1881~1882년 이후 약 10년 동안 로베르(Robert, 金保祿, 바오로, 1853~1922) 신부와 충청도를 나누어 담당한 두세(Doucet, 1853~1917, 丁加彌, 가밀로) 신부는 매우 넓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신자들을 열정적으로 순방하였다. 당시 로베르 신부는 주로 충청도 북부 지역을, 두세 신부는 충청도 남부 지역을 순회하였다. 이때 두세 신부가 방문한 지역들은 충청남도의 천안, 공주, 부여 등 10개 지역과 경기도의 안성, 평택 등 2개 지역이었다.

그리고 모두 35개의 교우촌을 공소로 설정하였다. 당시 공주 지역에는 서재(유구읍 명곡1리)·요골(유구읍 명곡2리)·무재(우성면 봉현리 무티) 교우촌이 재건되어 있었으며, 이들이 박해 이후 최초의 공소로 설정되었다. 이렇게 하여 두세 신부는 1885~1886년에 산막(사곡면 구계리, 현재는 유구읍 구계리) 공소를, 1886~1887년에 사기점골(유구읍 명곡1리. 서재 공소 안쪽) 공소를, 그리고 1887~1888년에는 마침내 공주읍내에도 진출하여 공주 공소를 설립하였으며, 이해에 안말(정안면 내촌리)과 운암산(운암리) 공소도 설립하였다.

공소가 설립될 무렵 공주읍내에는 신자 수가 20명 내외에 불과하였다. 1888~1889년에는 요골, 만악골(유구읍 명곡1리, 서재 공소 이웃), 사기점골, 버시니, 공주읍, 운암산 등 여섯 곳에서 공소가 열렸고, 다음 해에는 다시 삼배실(탄천면 운암리, 현재는 이인면 운암리, 운암산 공소 이웃) 공소가 추가되어 7개 공소로 증가하게 되었다. 1898년 파리외방전교회 진 베드로(기낭) 신부가 이곳에 성당을 세우고 교리 전파를 시작하면서 공주에 천주교가 자리 잡았다.



공주 중동 성당

현 성당 건물은 최종철 신부가 서울의 약현 성당을 모델로 직접 설계하여 1934년 공사를 시작해 1936년에 고딕식 종탑을 갖춘 라틴 십자형 새 성당과 사제관 · 수녀원 등을 완공했습니다. 이듬해 5월 12일 축성식을 가졌는데, 현재는 본당과 사제관(현 교육관)만 남아있습니다. 1982년 9월 공주 교동 성당을 분리하면서 공주 중동 성당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1997년 본당 설립 100주년과 성당 건립 60주년을 기념하여 성당 건물에 대한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시행했습니다. 또한 “중동본당 100년사”를 출간하고 12월 6일에는 기념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공주 중동 성당과 사제관 건물은 1998년 7월 25일 충청남도 기념물 제142호로 등록되었습니다.



공주 중동 성당



공주 중동 성당



공주 중동 성당



공주 중동 성당



공주 중동 성당 옛 사제관(현 교육관) 외부



공주 중동 성당 마당의 최종철 마르코 신부 묘소



최종철 마르코 신부 묘소



최종철 마르코 신부 묘소



최종철 마르코 신부 묘소



최종철 마르코 신부 묘소 성모상



최종철 마르코 신부 묘소







최종수 요한 순교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성당과 사제관 건물은 인민군에 의해 몰수되고 민청 및 정치 보위부 사무실로 그리고 인민재판소로 사용되었다. 이곳 공주를 점령한 인민군은 성당에 들어와 성모상을 비롯하여 감실과 제대에 닥치는 대로 총질을 하며 제의와 성작 성물들을 모두 훼손하고 군마를 성당 안으로 끌어들여 성전을 더럽혔다.

이것을 본 최종철(崔宗哲, 1890~1945, 마르코) 신부의 동생인 최종수 요한은 분개한 마음을 누를 수 없어 항의하다가 7월 20일 인민군의 총탄에 쓰러져 순교하였다. 그리고 당시 본당 회장이었던 권오헌 베드로는 흩어진 성체를 모두 모아 영하였다. 이런 순교와 모범적인 희생 덕분인지 더 이상 성당은 파손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간직한 채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



최종수 요한 순교비



최종수 요한의 순교비



성가정상



본당 입구 성모상



성당 내부



제대 감실





성체조배실



성체조배실



출처 : 사랑과 평화의 샘
글쓴이 : jeosahp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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