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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cern/나무&꽃

신라 자장율사의 주목(고규홍교수)

 

신라 자장율사의 주목
육신만 남기고 떠났던 자장율사의 현신이 된 나무

 

 신라의 대표적 승려 가운데에 황룡사 구층탑을 세우고 황룡사 주지로 주석했던 자장(慈藏, 590~658) 율사가 있다. 진골(眞骨) 출신이지만, 어린 시절에 부모를 여읜 그는 세속의 모든 인연을 떨치고, 깊은 산에 들어 오직 불가의 뜻에 따라 승려로서 살았다. 그가 당나라로 유학을 떠난 건 불혹의 나이를 넘긴 636년이었다.
  7년의 유학 생활을 마치고 643년에 귀국한 그는 경남 양산의 영취산 통도사(通度寺)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많은 절집을 지었다. 그는 특히 부처의 사리를 담은 사리탑을 세우는 대신 법당 안에는 부처의 상을 놓지 않는 방식의 적멸보궁을 지은 것으로 유명하다.  

 

 

1천3백 년 전 자장이 부처의 진신사리를 가져와 탑과 함께 세운 태백산 정암사의 적멸보궁

 

 

칡의 현현으로 절집을 짓고 문수보살을 기다려

  그 가운데 하나가 강원도 정선의 태박산 정암사다. 자장은 태백산에 들어서 문수보살을 기다리며 절집과 탑을 지으려 했다. 그러나 탑을 조금 세우면 곧바로 무너지기를 여러 차례 되풀이하여 잠시 공사를 멈추고 기도에 열중했다. 그러자 어느 날 갑자기 땅 위로 칡 세 줄기가 뻗어나오더니 한 곳에 멈추었다. 자장은 갑작스러운 칡의 현현을 신비롭게 여기고, 그 자리에 탑을 세웠다. 그리고는 칡이 나타나 절집 터를 점지해주었다 해서, 칡 갈(葛)자와 올 래(來)자를 써서 ‘갈래사(葛來寺)’라고 했다. 바로 지금의 정암사다.
  자장은 손수 지은 정암사에서 공손히 기도를 올리며 문수보살을 기다렸다. 그러던 어느 날 남루한 가사를 걸친 한 노인이 죽은 개를 삼태기에 싸 들고 와 ‘자장을 보러 왔다’고 했다. 그러나 누추한 행색의 노인을 스님의 시종은 내쫓으려 했다. 하지만 노인은 “자장을 만나야 떠나겠다.”라고만 했다.
  시종이 자장에게 노인의 갑작스러운 출현을 알렸지만, 자장 역시 문틈으로 비치는 노인의 행색을 대수로이 여기지 않고 쫓아버리라고만 했다. 시종에 의해 문전박대를 당한 노인은 “행색만 보고 사람을 업수이 여기는 교만한 자가 어찌 나를 알아 볼 수 있으리오”라고 한탄하면서 가져왔던 삼태기를 뒤집었다. 그 순간 삼태기 속의 죽은 개가 날개 달린 푸른 사자로 변했고, 노인은 그 사자를 타고 하늘로 올라갔다. 노인이 바로 자장이 그토록 기다리던 문수보살이었던 것이다.
  뒤늦은 후회감에 쌓인 자장은 문수보살의 뒤를 따르려 했지만,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다. 문수보살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자신을 나무라던 자장은 결국 자신의 육신을 이곳에 남겨둔 채 먼 길을 떠나기로 했다. 절집에는 정신과 영혼이 떠난 스님의 껍데기만 남겼다.

 

얼핏 보아서는 죽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싱그러운 푸르름을 간직한 정암사 주목.

 

 

 

자장의 지팡이에서 자라나 천년을 살아

  그리고 또 하나 남은 것이 바로 적멸보궁을 완공하고 꽂아두었던 주장자였다. 절집을 지을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전국을 돌아다닐 때에 짚고 다니던 지팡이다. 껍데기만 남기고 자장은 하늘로 떠났지만, 자장의 신표로 남은 주장자는 생명을 얻어 뿌리를 내리고 잎사귀를 피어올려 한 그루의 듬직한 주목으로 자랐다.
  오래 사는 나무, 장수목(長壽木)의 상징인 주목은 자람이 더딘 대표적인 나무다. 대개의 주목은 백 년을 자라봐야 겨우 10m 정도밖에 못 자라는 나무다. 더디게 자라는 대신 주목의 생명력은 무척 견고하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별명을 가지게 된 것도 그의 유난스러운 생명력 탓이다.
  ‘살아 천년’에 이어붙인 ‘죽어 천년’이라는 표현은 주목이 죽은 뒤에도 쓰임새가 많기 때문에 붙었다. 다루기 쉬우면서도 단단하고 잘 썩지 않는 목재는 가구재나 건축재로 많이 쓰인다.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에는 주목을 활의 재료로 쓰면서 화력이 몇 배 더 나아졌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단단하면서도 탄력이 높은 주목의 특징을 잘 살린 쓰임새다. 목재 뿐 아니라, 잎과 열매도 한방에서 귀중한 약재로 써왔다. 주목의 잎은 잘 말려서 신장병과 위장병에 이용했고, 열매는 구충제로 썼다. 어느 한 부분 그냥 버릴 게 없다는 이야기다.
  주목은 나무 줄기에 붉은 색을 띠고 있어 붉은(朱) 나무(木)라 불리는데, 강원도에서는 같은 뜻에서 적목(赤木)이라고도 부른다. 주목의 학명에도 붉은 색이라는 게 표시될 정도로 주목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이 바로 줄기 색깔이다.

 

 

죽은 나무의 껍질 안쪽에서 새 생명이 싹을 틔워

  1천3백년 전에 자장의 지팡이가 자랐다고 하는 정암사의 주목은 겨우 4m 쯤 되는 키로 자랐는데, 나무 꼭대기 부분으로는 허옇게 말라죽은 것으로 보이는 줄기가 삐죽이 솟구쳤다. 이 부분까지 합하면 6미터가 조금 넘어 보인다. 그런데 나무 꼭대기 부분이 심상치 않다. 가만히 살펴보면 이 꼭대기에서 솟아오른 줄기는 이미 오래 전에 말라 죽은 게 분명하다.
  다시 나무 줄기 부분을 살펴보면 놀라움은 한층 더 깊어진다. 나무 껍질을 아무리 들여다봐도 주목의 가장 큰 특징이라 할 만한 붉은 빛이 전혀 나지 않는다. 푸른 잎이 울창하게 돋아난 살아있는 나무임이 틀림없건만 마치 죽은 나무처럼 줄기 껍질에는 생기가 조금도 돌지 않는다. 붉은 빛은 커녕 오히려 나무 꼭대기 부분 줄기의 회색 빛을 그대로 드러나 있다. 심지어 곳곳에는 푸른 이끼가 올라와서 죽은 나무 줄기라는 걸 선명하게 보여준다. 게다가 나무 줄기의 상당 부분은 땅 바닥에서 들려 있기까지 하고 줄기 껍질 안쪽이 휑하니 비어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자장의 그 주목은 이미 오래 전에 죽은 게 확실하다. 죽어서 껍질만 남은 상태로 쓰러지지 않고 남아있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공교롭게도 옛 나무의 씨앗 하나가 죽은 나무의 텅빈 줄기 안쪽에 떨어졌던 모양이다. 세월 지나면서 그 한 톨의 씨앗은 어두운 줄기 안쪽의 텅빈 공간에서 싹을 틔우고 자란 것이다.
  죽은 나무를 바람막이로 삼으며 애면글면 자라난 새 생명은 빈 공간을 따라 곧게 자랐다. 흥미로운 것은 죽은 나무 껍질의 구멍난 부분으로 가지를 하나씩 내밀면서 푸르게 자라났다는 것이다. 죽은 나무의 껍질 부분에 세월의 상처가 새겨놓은 썩어 문드러진 구멍마다 어김없이 어린 생명의 새 가지가 뻗어 나왔다.

 

 

바깥 쪽으로는 죽은 나무의 줄기 껍질이 여전히 남아있고,

그 안에서 새 생명이 움터 자라난 신비로운 모습의 정암사 주목.

 

바닥에서 들린 상태로 남아있는 죽은 나무의 껍질 안쪽에서 어린 나무 한 그루가 듬직하게 자랐다.

 

과학과 신화 사이의 어울림을 짚어보게 해

  빛을 찾아 자신의 삶을 이어가야 하는 나무가 빛이 새어들어오는 구멍을 찾아 가지를 뻗어내는 건 지극히 당연한 노릇이다. 자연의 이치가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신비로운 모습인 건 어쩔 수 없다.
  얼핏 보아서는 나무 안에 또 한 그루의 새 나무가 자랐다는 걸 눈치챌 수 없을 만큼 삶과 죽음이 이뤄낸 조화는 완벽하다. 나무 앞에서 껍데기만 남기고 이승을 떠났다가 좋은 시절을 찾아 생명의 숨결을 불어넣은 자장을 떠올리는 건 지당한 일인지 모르겠다. 쳔년의 삶을 과학으로 해석하는 게 어디까지 가능할까 생각해 보게 하는 신비로운 자태의 나무다.

 

 

무성하게 나뭇가지와 잎을 뻗은 자장의 지팡이 나무. 나무 꼭대기로 허옇게 말라죽은 죽은 부분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