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화시와 시가
한국 시가 문학에서 처음으로 나오는 매화는 고려 고종 때 한림제유(翰林諸儒)가 지은 경기체가(景幾體歌) 『한림별곡(翰林別曲)』의 제'5'장에 등장하는 「옥매(玉梅)」이다. 이 시는 모란과 작약, 장미와 동백 등과 함께 ‘옥매’가 정원 사이사이 피어난 광경을 노래했다. ‘옥매’는 당대 세도가의 정원에 핀 아름다운 꽃이다. 세도가는 물론 그 문하에 드나들던 선비들이 애호했던 이름난 꽃의 하나이므로, 완상물(玩賞物)을 뜻한다.
매화는 한시에서는 다양하게 나타나지만 국문 시가에서는 그리 다양하지 않다. 시조에 주로 나타나는데 『한국시조대사전』(박을수 편, 아세아문화사)에 수록된 5,492수의 시조 가운데 꽃 이름이 나타나는 작품은 499수이다. 이 중 가장 많이 나타나는 꽃은 복숭아꽃(118수)이고, 그 다음이 매화(64수)이다. 시조에서 최초로 매화를 읊은 사람은 고려 말의 이색(李穡)이다.
백설(白雪)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梅花)는 어느 곳에 피엇는고
석양에 홀로 서 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고려 말의 시대상에 비추어 볼 때, 이 시조의 초장은 현실의 암울하고 어두운 상황이, 중장은 화자의 마음을 반갑게 맞아 줄 매화를 찾는 모습이, 종장에는 기울어 가는 국운을 바라보면서 방황하고 안타까워하는 심정이 나타나 있다. 이 작품에서 매화는 표면적으로는 봄의 도래를, 이면적으로는 지조나 절개를 지닌 충신, 군자, 선비 정신 등을 상징한다.
가난한 선비를 비유한 매화
모란(牧丹)은 화중왕(花中王)이요 향일화(向日花)는 충신(忠臣)이로다
연화(蓮花)는 군자(君子)이오 행화(杏花) 소인(小人)이라 국화(菊花) 은일사(隱逸士)요 매화(梅花) 한사(寒士)로다 박꽃은 노인(老人)이오 석죽화(石竹花)는 소년이라 규화(葵花) 무당(巫黨)이요 해당화(海棠花)는 창기(娼妓)로다
이 중에 이화(梨花) 시객(詩客)이요 홍도(紅桃) 벽도(碧桃) 삼색도(三色桃)는 풍류랑(風流郞)인가 하노라
매화는 충신, 군자, 은일사, 한사 등의 상징으로 곧잘 전용되지만, 이 작품에서 매화는 가난하고 아무런 세력도 갖지 못한 선비이자, 고결한 기품을 가진 선비인 한사를 가리키고 있다.
매화 향기와 아름다움
매화는 이른 봄 눈발이 아직도 분분한 가운데 아름다운 꽃망울을 터트린다. 매화는 봄을 알리는 징표인 것이다.
매화(梅花) 피다커늘 산중(山中)의 드러가니
봄눈 깁헛는데 만학(萬壑)이 한 빛이라
어디서 꽃다운 향(香)내는 골골이서 나느니
- 작자 미상
매화가 피었다는 말을 듣고 산중에 들어가니 아직도 봄눈은 깊어 골짜기마다 흰 눈이 쌓여 있는데 어디선가 아름다운 향내는 골골마다 풍겨 온다는 뜻이다. 이 작품에서 매화는 봄소식을 알리는 징표이지만 암향부동(暗香浮動)이라는 매화의 일반 풍취(風趣)도 작품에 깔려 있다.
설월(雪月)이 만건곤(滿乾坤)하니 천산(千山)이 옥(玉)이로다
매화(梅花)는 반개(半開)하고 죽엽(竹葉)이 푸르럿다
아희야 잔(盞) 가득 부어라 춘흥(春興) 계워 하노라
- 작자 미상
이 시조에서도 매화는 봄을 알리는 징표로 사용된다. 달빛이 눈 쌓인 산들을 비추니 모든 산들이 옥으로 반짝이는데, 매화가 반쯤 피고 죽엽이 푸르니, 봄이 머지않았다는 의미이다. 화자는 이에 춘흥(春興)을 이기지 못해 술잔을 기울인다는 뜻이다.
이외에 이화진이 지은 시조에 ‘매화우(梅花雨)’가 나오는데, 매화우는 매화가 필 무렵에 내리는 봄비를 말하는 것으로 매화가 계절 상징으로 활용된 것이다.
아름답고 사랑스런 여인에 비유한 매화
매화를 소재로 한 시조에서 매화의 상징성은 단일하지 않다. 매화 자체가 지니고 있는 암향부동과 같은 아취(雅趣)와 연관을 맺으며 애정 상관물로도 활용된다.
설월(雪月)의 매화(梅花)를 보려 잔을 잡고 창(窓)을 여니
석인 꽃 여왼 속에 자잔느니 향기(香氣)로다
어즈버 호접(蝴蝶)이 이 향기 알면 애 끈칠가 하노라
- 이신의
이 작품은 매화가 향기를 뿜는데 호접이 이 향기를 알면 애가 끊어질 것이라는 뜻이다. 즉 남녀 간의 연정을 노래한 것이다. 애정 상관물로서의 매화는 다음 시조에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동창(東窓)에 달 비치고 합리(閤裡)에 매화(梅花) 피니
화용월태(花容月態)는 천연(天然)할사 님이언만
엇지타 낭낭 옥음(玉音)은 들을 길 업서
- 호석균
이 작품에서 매화는 달빛이 비쳐 드는 잠자는 방안(閤裡)에 핀 매화이다. 그 매화는 곧 화용월태(花容月態)의 임과 천연하게 닮았는데, 아무 말이 없어 낭랑한 임의 옥음(玉音)은 들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이 작품에서의 매화는 사랑하는 임을 상징한다.
매화사
매화를 대상으로 한 시조 가운데 매화의 아취와 운치를 노래한 작품은 적지 않지만, 매화의 아름다움을 집약적으로 표현한 작품은 조선 고종 때의 예인 안민영(安玟英)의 「매화사(梅花詞)」 8절을 꼽을 수 있다.「매화사」 3절에서 매화는 눈 속에 피어나는 ‘빙자옥질(氷姿玉質)’로서, 또 그윽한 달빛과의 조화를 이루는 ‘아치고절(雅致高節)’로 노래되고 있다.
7절에서는 앞뒤의 연들과 달리 율격이 평탄하지 않고 급박하게 진행되며, 매화의 형상도 방안의 매화가 아니라, 나부산 눈 속의 울퉁불퉁한 굵은 등걸, 그것도 반 이상 썩은 등걸에서 가지를 돋쳐 핀 매화로 그려진다.
충절의 매화
이외에도 매화의 아취와 운치를 노래한 연시조로는 권섭의 「매화사장(梅花四章)」이 있다. 이세보도 4수의 매화 시조를 남긴다. 18세기 초의 유명한 가인이던 김성기(金聖器)도 매화의 아취와 운치를 읊은 작품을 남긴다.
한편, 시조 이외의 가사에서도 매화가 표현된 작품들이 더러 나타난다. 가장 이른 시기의 작품으로는 이인형(李仁亨)의 「매창월가(梅窓月歌)」가 있다. ‘매화와 창(窓)과 달’이라는 세 가지 소재를 대상으로 삼은 자문자답 형식의 가사인데, 자신의 은일 취향을 나타낸 작품이다.
정철(鄭澈)의 「사미인곡」은 선계(仙界)에서 인간 세계로 내려온 여인의 목소리로 임금을 그리워하는 신하의 지극한 충정을 나타낸 연군가사(戀君歌辭)이다. 작품을 서사'―'본사'―'결사로 나누어 볼 때, 본사에는 춘하추동 네 계절의 변화에 따른 그리움이 표현되어 있다. 봄을 읊은 노래에는 나의 분신 ‘매화’를 임에게 보내고 싶다는 소망이 나타난다. 여기에서 매화는 애정 상관물로 표현되고, 임과 이별한 여성화자의 분신이기도 한데, 이면적으로는 벼슬에서 물러난 지조 있는 충신의 마음을 표상한 것이다.
이러한 표상은 앞 시기의 유배 가사이자 연군가사인 조위(曺偉)의 「만분가(萬憤歌)」에 나오는 표현과 흡사하다. 즉 문학적 변용이 이루어진 것이다. 이외에 최현(崔晛)의 「명월음(明月吟)」, 작자 미상의 「승가타령」, 「재송여승가」, 「규중가」, 「화전가」 등, 여러 작품에 매화가 나타나지만 거의 대부분 부분적인 표현이며, 매화만을 독립적으로 작품화한 가사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가사에 나타나는 매화의 표현 용례를 살펴보면 위에서 보인 매화 상징들에서 벗어나지 않는데, 이는 국문 시가로서 시조와 가사는 장르 간 표현의 관용적 차용이 일반화되었던 까닭일 것이다. | 김학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