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사유 궁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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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사유 궁전(프랑스어: Château de Versailles)은 프랑스의 베르사유에 있는 왕궁이다. 베르사유는 원래 파리의 시골 마을 중 하나였으나 이 궁전이 세워진 이후부터는 자치권을 가지는 파리 외곽의 도시가 되었다. 1682년 루이 14세는 파리에서 이 궁전으로 거처를 옮겨서, 1789년 왕가가 수도로 돌아갈 것을 강제될 때까지, 베르사유 궁정은 프랑스 앙시앵 레짐 시기, 권력의 중심지였다. 바로크 건축의 대표작품으로, 호화로운 건물과 광대하고 아름다운 정원으로 유명하다.
베르사유 궁전이 실제로 궁전으로서 사용된 기간은 매우 짧고, 1715년 루이 14세 사후, 뒤를 이은 루이 15세는 곧바로 파리로 다시 궁정을 옮겼다.
나중에는 빌헬름 1세의 즉위식이 열리기도하였다.
"e;짐이 곧 국가"e;라고 말할 수 있었던 루이 14세는 정복의 왕이었다. 그가 거처하는 베르사이유 궁전에는 연일 전국의 영주들과 외국 사신들이 장사진을 이루었다. 그들의 손에는 한꾸러미씩의 보물함들이 함께 도착되었는데 그속에 들어있는 것이 바로 진기한 보석들이었고, 보석의 영광은 이 베르사이유 궁전을 통해 화려하게 꽃피기 시작했다.
그러나 보석의 영광은 이보다 앞선 르네상스 시대부터 준비되고 있었다. 중세 기독교적 속박에서 벗어나 개인과 개성이 인격체로서 존중받기 시작했고 보석 또한 주술적인 의미로부터 해방되어 그 참 존재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보석은 기독교에서 반지나 지팡이에 장식되어 신앙의 상징 또는 절대 권력을 상징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자연인으로서의 인간을 발견하였고 그에 따라 주술적인 의미의 상징성이 사라지고 보석의 미학적이 면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이렇듯 보석에 대한 관념의 변화는 그것을 향유하는 계층도 바꾸어 놓았다. 즉 보석이 단순히 장식으로서의 의미만을 갖게 되자 남성들은 보석으로부터 서서히 멀어지기 시작했고 여성들은 장식으로서의 가치를 강조하면서 앞을 다투어 보석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 시기부터 보석은 여성화되기 시작했는데, 특히 투명하게 반짝이는 보석이 더욱 사랑을 받았다.
"e;다이아몬드의 생명은 빛 자체에 있다"e;는 조제프 주베르의 지적처럼 투명성이 보석을 고르는 첫째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즉 햇빛과 움직이는 촛불을 반추시킬 정도로 투명해야 하고, 이것들이 살아 숨쉴 수 있는 모양과 공간이 있어야 비로소 제대로 된 품격을 갖춘 보석으로 대우를 받았다. 2세기가 지난 지금 생각해도 놀라운 심미안을 갖춘 기준이다.
■ 세공의 발달과 보석 패션
이 시기에 이룩된 보석 세공법의 발달은 놀라운 것이었다. 예술적인 감각과 보석의 컬렉션이 조화를 이룬 것인데, 특히 18개의 다이아몬드를 연결시킨 작품의 출현은 획기적인 것이었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다이아몬드 1개를 제외해놓고 17개를 새롭게 세공하여 제작한 보석세공사 카디널이 그 주인공이었다.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의 다이아몬드 1개를 제외해놓고 17개를 새롭게 세공하여 제작한 보석세공사 카디널이 그 주인공이었다. 그는 경험에 의존하여 기존 세공 기술을 개선하여 결과를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소위 "e;더블 커팅"e; 또는 "e;마자랭커팅"e;이라고 부르는, 두 개의 테이블에 32개의 패시트(보석을 자른 면)을 구성하는 세공 방법을 개발하여 보석 세공업계에 큰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그후 이 작품보다 한발 더 나아가 56개의 패시트로 구성하는 세공법이 개발된 것은 17세기 말, 비잔티움의 보석 세공사 빈센조 페루찌에 의해서였다. 그는 카디널의 32개의 패스트로 구성하는 세공보다 24개의 패시트를 더 늘려 놀랍도록 정교한 커팅 기술을 개발하여 오늘날에 까지 이용하게 하는 천재성을 발휘했다.
이 시기의 보석이 가진 특성은 단순히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생명 그 자체가 담긴, 하나의 완벽한 형태로서의 아름다움이었다. 아울러 훈장이나 기장에도 버석 장식을 부착했고, 나무와 꽃 장식이 크게 유행했다. 장 로뱅이 꽃 장식을 시도한 이래 생화 장식까지 유행, 나아가 잎 장식과 새, 리본 등의 도안으로 발전해 갔다.
날이 갈수록 카달로그와 디자인이 풍부해지고 장식의 오브제도 확장되어 갔다. 리용의 실크가 우아하고 밝은 색상으로 사랑을 받으면서 보석 디자인 오브제로 이용되었고, 꽃다발이나 새 또는 리본으로 널리 쓰였다. 의복에 값비싼 보석 단추가 부착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루이14세도 단추장식을 무척 애용했다고 전해진다. 시가 1백만파운드짜리 다이아몬드 단추를 달고 만찬에 참석했는가 하면, 1685년에는에는 보석 세공인 피에르 드몽토르지로 하여금 총 108개의 다이아몬드 단추를 단 옷을 만들게하여 이 옷을 입고 외국 사신들을 영접하기도 했다. 로이 14세는 시가 1,033,463파운드짜리 옷을 입은 셈이다. 그것도 다이아몬드 값만.
여성 패션은 세비네라고 부르는 대형브로치가 유명했다. 브로치는 술을 길게 늘어뜨린 활모양의 제품이 애용되었다. 또 어깨를 드러내는 의상 패션이 유행하면서 목 주변에 보석 장식을 한 리본이나 비단 리본을 단 목걸이도 귀부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팔찌 역시 마찬가지였다. 특히 보석 디자인과 조화를 이룬 질르레가레의 작품이 가장 고가품이었으며 그 아름다움 역시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것은 꽃?이 선명하게 장식된 디자인에 에메랄드와 루비, 아이아몬드를 장식한 6개의 장식으로 구성된 것이었는데 뒷 장식틀에도 보석 색깔의 에나멜칠을 하여 정교한 솜씨로 처리되어 그 가치가 더욱 높아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