草書(초서)란 ?
草書(초서)는 초(草)는 초고(草稿)의 뜻을 나타낸 것이다. 신속히 쓰는 필기체로서, 중국(中國) 한대(漢代)에 비롯되었다.
전한(前漢) 무렵, 전서(篆書)의 필기체로서, 고초(古草)가 있고, 후한(後漢) 초기(初期)에 장초(章草)가 생겼으나 이것은 예서(隸書)의 자획(字劃)을 간략하게 한 것이며, 붓을 치키는 팔분(八分)의 필법(筆法)을 가진 기복(起伏)이 심한 것이었다. 후(後)에 동진(東晉) 초기(330?)에 팔분(八分)의 필법(筆法)은 없어지고, 한 자씩 차분히 쓰는 왕희지(王羲之)의 십칠첩(十七帖)과 같은 독초체(獨草體)나 붓을 떼지 않고 이어서 쓰는 왕희지의 상란첩(喪亂帖)과 같은 연면체(連綿體)가 생겼다. 왕희지(王羲之)나 그의 흐름을 따르는 서가(書家)들에 의해서, 간략, 민속한 필기체라는 편리성보다도 초서(草書) 독특한 미(美)가 발휘되었고 당대(唐代)에는 더욱 흘려 쓴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과 같은 광초체(狂草體)를 낳았다. 또한 초서(草書)를 해서(楷書)의 흘림 글씨로 해석(解釋)하는 것은 잘못이며, 해서(楷書)는 초서(草書)보다 후에 성립된 것이다. 초서(草書)는 독립(獨立)된 법(法)에 의하여 쓰여지는 서체(書體)의 하나이다.
초서(草書)는 장초(章草), 금초(今草), 광초(狂草)의 세 가지로 분류한다.
장초는 원래 한례(漢隷)는 전한(前漢) 중간에 완성되어 널리 쓰였지만 시대(時代)의 흐름에 따라 점획(點劃)을 붙여서 간소화되었고 후한(後漢) 초기에는 예서(隸書)이면서 행초서(行草書)를 닮은 서체(書體)가 생겼다. 이것이 장초(章草)이다. 색정(索靖)이 썼다고 전해지는 월의장(月儀章), 출사송(出師頌), 황상(皇象)의 급취장(急就章), 후한(後漢) 장제(章帝)의 천자문(千字文), 육기(陸機)의 평복첩(平復帖) 등이 전하여졌다. 둔황[敦煌]에서 목간(木簡)이 발굴되면서 고담(枯淡) 주경(馥勁)한 장초의 진수를 엿볼 수 있게 되었다.
광초(狂草)는 문장(文章)을 쓸 때 그 시작에서 끝까지 글자가 연결되도록 쓰여진 초서(草書)를 말한다
古詩四貼-장욱
초서의 대가인 장욱이 남긴 고시사첩이다,
필맥이 끊어짐이 없고 필압이 학이 춤을 추듯 너훌댄다 필세가 등등하고,끝없이 외로운마음을
초서로 풀어내는 그의 초서작품은 한�힌 풀이를 하는 글씨의 형세를 가졌다,
점획을 찍을때도 물방울 떨구듯 투루룩,,,떨구며,써내려갔다,진경의 쟁좌위첩의 사부답다,
경직됨없으며,곡직이 분명하고,원필세를 더해 물흐르듯,,써내려간,,고시사첩을 보면,
왕희지행서가 무색하다,,
李白憶舊游詩卷
손과정의 書譜
송휘종의 초서천자문-宋徽宗 《草書千字文》
王羲之.十七帖(왕희지 십칠첩)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초서(草書)로 쓴 편지를 모은 법첩(法帖).
책머리에 있는 <십칠일(十七日)>이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모두 모각(模刻)이며 원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태종황제(太宗皇帝)가 수집한 약 3000통의 왕희지의 편지를 분류해서 일장이척(一丈二尺)의 두루마리로 편찬한 것의 하나로서,
107행(行) 942자(字) 23첩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장언원이 보았다는 묵적본(墨跡本)은 그 뒤에 산일(散逸)되었고 현존하는 것은 6첩이 증가한 29첩의 각본(刻本)이며 134행 1154자이다. 많은 각본은 첩미(帖尾)에 <칙(勅)>자를 크게 쓴 관본(館本)과 하지장(賀知章)의 임본(臨本)을 저본으로 한 하감본(賀監本)의 두 계통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서(書)는 임사(臨寫)와 모사(模寫)를 겹친 것으로 생각되는데 결체(結體)는 바르고 웅건중후(雄健重厚)한 느낌이 있다.
왕희지 초서의 대표작으로서 예로부터 최상의 모범이 된 책이라고 일컬어져 온 것이다
花氣熏人帖(화기훈인첩)
송(宋) 황정견(黃庭堅, 1045-1105)
칠언시 화기훈인첩(七言詩 花氣薰人帖)
서첩(書帖), 종이에 먹, 30.7 x 43.2 cm
"송사가묵보책(宋四家墨寶冊)" 제 9 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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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세에 진사(進士)에 급제하여 산서(山西) 태화(太和)의 지현(知縣: 군수),
교서랑(校書郎),저작좌랑(著作佐郎), 기거사인(起居舍人) 등의 벼슬을 하였고
악주(鄂州), 부주(涪州), 융주(戎州), 의주(宜州) 등의 지주(知州: 주지사)를 지냈다.
장뢰(張耒), 조보지(晁補之), 진관(秦觀)과 함께 소식(蘇軾)에게 인정받아
“소문사학사(蘇門四學士)”라고 일컬어 지는데 시를 잘 지어 소식과 그 이름을 나란히 한다.
황정견의 서법의 기원은 다양한데 주로 안진경(顏真卿, 709-785)과 소식 그리고 남조(南朝) 석각(刻石) <예학명(瘞鶴銘)>의 영향을 받았다.
소성(紹聖) 원년(1094) 좌천되어 검(黔: 오늘 날의 귀주(貴州))에 있을 때 당나라 회소(懷素)의 초서
<자서첩(自敘帖)>을 보고 이에 많은 영감을 받아 용필에 더욱 힘이 넘치고
초서적인 서체로 변화하였다.
이 서예 작품에는 낙관이 없지만, 이것은 원우 2년(元祐, 1087) 양주(揚州)에 사는 벗 왕공(王鞏)에게
보내는 시 두 수에 덧붙여졌던 것으로 현재는 독립된 서첩이 되었다.
앞부분에 원래 제문이 있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왕진경(王晉卿, 또는 왕선(王詵))은 시를 보내와 나에게 답시를 청하였지만,
내가 늙고 게으른 탓에 시를 써주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에 포기하지 않고 또 꽃을 보내와 시를 보내줄 것을 재촉하니 하는 수 없이 이 시를 써서 그에 답하노라.
(王晉卿(詵)數送詩來索和,老嬾不喜作,此曹狡猾,又頻送花來促詩,戲答.)”. 이 글을 통해 이 시가 본래 왕선에게 써준 화답시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용필은 힘이 있고 강건하며, 먹색은 진하고 습윤함과 건조함 사이에 변화를 주고 있는데, 소품 중에 보기 드문 수작이다 |
황정견의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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