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롱나무 꽃
사정없이 내려쬐는 뜨거운 여름 햇살을 살살 구슬려서 꽃을 만들어내는 나무가 있다. 초록 세상에다 꽃으로 오뚝 선 배롱나무(백일홍나무)가 그 주인공이다. 진분홍빛 꽃이 가장 흔하고 연보라 꽃도 가끔 있으며 흰 꽃은 비교적 드물다. 가지의 끝마다 원뿔 모양의 꽃차례에 따라 콩알만한 꽃봉오리가 나무의 크기에 따라 수백 수천 개가 매달려 꽃필 차례를 얌전히 기다리고 있다. 살포시 꽃봉오리가 벌어지면서 주름투성이 꽃잎 6개가 얼굴을 내민다. 여름 햇살이 아무리 이글거려도 주름을 펴는 데는 역부족이다. 배롱나무는 초여름에 꽃피우기를 시작하면 가을까지 이어진다. 그래서 백일을 꽃핀다는 뜻으로 백일홍이라 하며, 백일홍나무가 부르기 쉽게 ‘배기롱나무‘라고 하다가 공식 이름인 배롱나무가 된 것 같다. 하지만 꽃 하나하나가 이렇게 오랫동안 피는 것은 아니다. 한꺼번에 피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이어 달리기로 피기 때문에 백일을 피는 꽃으로 착각한다. 멀리 중국에서 시집 왔으며 당나라 때 자미성에 많이 심어서 그네들의 원래 이름은 자미화(紫微花)란 이름이 생겼다 한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를 비롯하여 충신 성삼문에 이르기 까지 수많은 선비들이 사랑한 꽃나무이기도 하다. 들어온 시기는 적어도 고려 이전이다. 따라서 옛 선비들의 삶의 흔적을 쫓아가면 수많은 배롱나무 고목을 만날 수 있다. 여름 내내 꽃피우느라 기력이 쇠진 할만도 한데, 배롱나무는 수백 년을 거뜬히 살아가는 나무나라의 슈퍼맨이다.
신윤복의 소년전홍(少年剪紅) 배롱나무, 28.3×35.4cm 간송미술관 소장
먼저 조선시대 그림 소년전홍(少年剪紅)에서 배롱나무를 만나보자. 남녀 간의 사랑을 화폭에 담은 신윤복의 대표적인 풍속화인데, 엉덩이를 살짝 뒤로 뺀 앳된 모습의 여인을 젊은 선비가 팔을 약간 비틀어 잡아채고 있으나 표정으로 보아서는 서로가 그렇게 싫지 않다는 느낌이다. 화면 오른쪽과 아래의 꽃나무는 가지 뻗음이나 꽃대 달림 및, 화제(畵題)에 ‘소년이 붉은 꽃을 꺽다’라고 하였듯이 꽃의 색깔 등에서 한 눈에 배롱나무임을 알아 낼 수 있다. 화려한 여름 꽃인 배롱나무가 제철을 만난 듯 이제 막 피어나고 있으니 때는 장마가 끝난 대체로 7월 중하순쯤일 것이다. 이렇게 선비들의 공간에 흔히 심고 가꾸기를 좋아했으며 전통 사찰에서도 자주 만날 수 있다.
정문도공 묘소 앞 천연기념물 168호 배롱나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배롱나무는 부산 양정동의 ’화지공원‘ 안 동래 정씨 2대 조(祖)인 정문도공의 묘소 앞에서 만날 수 있다. 정공은 약 8백 년 전인 고려중엽 때 안일호장(安逸戶長)이란 벼슬을 지냈다. 왕릉 못지않은 규모의 묘소 앞 동서쪽에다 각 각 한 그루 씩를 심는 배롱나무가 천연기념물 168호로 지정되어 오늘까지 보존되고 있다. 이렇게 꽃이 오랫동안 피는 나무를 심은 뜻은, 조상의 유훈을 오래 기리라는 뜻이라고 한다. 그러나 지금은 원줄기는 죽어버리고 그 주변에 돋아난 싹이 자라 동쪽에 4그루, 서쪽에 3그루씩 작은 숲처럼 모여 있다. 전설에 따르면 처음 묘를 썼을 때 매일 밤 도깨비가 나타나 파헤쳐 버리기를 반복했다한다. 숨어서 살펴보았더니 ’임금님의 황금 관이나 묻을 장소‘라고 저희들끼리 중얼대는 것이었다. 이에 보릿짚으로 관을 둘러싸 황금 관으로 위장하여, 도깨비 눈을 속이고 나서야 겨우 묘를 쓸 수가 있었다. 이후 동래정씨 가문에는 출세한 후손들이 많아 명당임이 널리 알려졌다. 오늘의 눈으로 보아도 여기가 ’명당’임에는 별 다른 이의가 없다. 부산시가 팽창하면서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후손들에게 안겨준 부는 엄청나다. 요즈음이야 이런 명당은 부동산 투기꾼들이 모두 차지하여, 도깨비가 알려 줄만한 ‘알짜 정보’는 아쉽지만 모두 없어져 버렸다.
명옥헌원림 배롱나무가 만개하여 장관을 이룬다
꽃이 가장 풍성하고 아름다운 배롱나무 숲은 담양 후산리 명옥헌의 전남기념물 44호 원림(園林) 배롱나무다. 정자 아래 작은 연못이 있고 주변에는 굵은 것은 거의 한 아름에 이르는 배롱나무 수십 그루가 둘러싸고 있다. 대체로 8월 중하순경 만개할 때 찾아보면 말 그대로 장관이다.
율곡선생이 심었다는 강릉 오죽헌 배롱나무
경주 서출지와 배롱나무
그 외 강릉 오죽헌의 율곡 선생이 심었다는 배롱나무를 비롯하여 강진 백련사, 고창 선운사, 경주 서출지 등도 배롱나무 명소로 널리 알려져 있다.
또 산림청에 지정한 보호수도 14그루나 있다. 배롱나무에는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옛날 남해안의 어느 바닷가 마을에서는 해룡(海龍)이 파도를 일으켜 배를 뒤집어 버리는 심술을 막기 위해 매년 처녀를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해마다 마을에서 가장 예쁘고 얌전한 처녀를 선발하여 곱게 화장을 시켜 바닷가 바위로 올려 보내 해룡이 데려가도록 했다. 그러던 어느 해 마침 나라의 왕자님이 마을을 지나다가 안타까운 사정을 듣고 처녀 대신 바위에 앉아 있다가 용을 퇴치해 버린다. 이후 마을에 얼마 동안 머물던 왕자는 처녀와 사랑에 빠진다. 사랑에는 마가 끼는 법, 왕자는 마침 출몰한 왜구를 퇴치하기 위하여 100일 뒤에 다시 만나기로 하고 떠나버린다. 매일 먼 바다를 바라보며 왕자를 기다리던 처녀는 상사병이 들어 100일을 다 기다리지 못하고 죽고 만다. 약속 날짜에 돌아온 왕자는 그녀를 양지바른 곳에 묻어주었다. 이듬해 무덤 위에는 나무 한 그루가 자라더니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마치 왕자를 기다리듯 매일 조금씩 피는 꽃이 100일을 넘겨 이어지므로, 사람들은 이 나무를 백일홍나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